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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실무자

차세대 한살림선언을 고민한다면

by 석탄이 2019. 8. 28.

항상 성능좋은 차세대 전산프로그램을 바라는 만큼 한살림선언도 업그레이드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차세대 한살림선언'이라는 용어를 써 봅니다. 

 

한살림실무자로 입사하면서 처음 접하게 된 한살림선언은 말 그대로 '난공불략'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대부분 실무자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 같다. 

나도 꽤 한참동안은 그랬었다. 

 

그러다가 한살림 선언이 읽은만한 책이라고 여겨지게 된 두 구절을 알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가 "인류진화의 창조적 초월은 바로 한반도에서 시작될 것이 틀림없다"(70p)

온통 이해 하기 힘든 구절로 쓰여 있던 책이었는데 이런 메시야적 예언이 들어있다는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살림을 종교집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이 문구는 정말 종교적 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우리나라가 전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주장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이후에 콘드라프예프 파동, 헤게모니 파동, 중국의 G2 대두, 촛불 혁명,  통일 논의 확대 등의 세계사적 흐름을 알게되면서 

나는 아직도 이 예언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성지순례하듯 한살림선언 책이 불티나게 팔리지 않을까???^^

 

두번째로 한살림선언이 스물스물 적셔지게 된 계기가 된 건 다음의 문장이었다. 

"후천개벽은 무위이화로 되어 가는 것이다" (56p)

일을 하다 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겪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면 항시 예수님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우리의 현실을 확 바꿔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수도없이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이 구절이 떠올랐다. 

개혁은 누군가 한번에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과 새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갈아드는 진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각자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술집에서 아무리 뒷담화를 하더라도 그건 현재 상황을 바꾸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문구는 실무자로서 일하는 데 항상 염두에 두게 하는 구절이었다. 

 

한살림 선언 안에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 텐데 닥치는 일처리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15년 세월에서 그나마 찾아낸 게 딱 2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2개의 구절이 나에게 있어 한살림 선언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 단초가 되었지만,

종교적 예언같기도 하고, 흔히 접하는 자기계발서 같은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한살림선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하고 더 큰 기대를 할 수 있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살림선언이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은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이라든지 '불확정성의 원리''엔트로피 법칙''공진화' 등에 대해 거의 모른다. 

아니 너무 난해해서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이미 이론이 확립된 지 100년 가까이 되가는 현재도 그러한데 한살림선언이 만들어진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 자본주의의 모순의 반대 급부로 한살림선언은 새로운 과학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론적 토대로 활용하였다. 

 

이 점이 앞으로 만약 '차세대 한살림선언'을 고민한다면 가장 염두해 두었으면 하는 점이다. 

한살림선언이 나온 이후에 30년동안 한살림이 이야기했던 것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평가해보는 것보다는

현재 시점에서 앞으로 예견되는 인류의, 사회의, 우리의 삶을 고찰하는 데 있어

과학적인 변화를 예상하고 필요하다면 그러한 사살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한살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함께 고민되었으면 한다. 

 

'알파고 대전'으로 비롯된  4차 산업혁명 열풍과 함께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블록체인, 가상현실, 양자컴퓨터 등을 감안하지 않고,

변화의 시기에 인간과 생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에 대한 과학적 고민이 없이는 

새로 쓰여지는 한살림선언은 그냥 종교적인 예언서가 되고 공감이 없는 자기걔발서에 머무르지 않을까 

나의 경험에 빗대어 조심히 생각해본다.